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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폴 크루그먼의 생애

 

 

 

경제학에 지리학을 접목한 최초의 경제학자이자 2008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국제무역에 대한 연구로 이전에 사용되던 비교우위보다 더욱 정교한 무역 모델을 구축해 낸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인 크루그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메릭 상공

 

 폴 크루그먼은 1953년 2월 28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데이비드 크루그먼과 아니타 크루그먼으로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부부이다. 크루그먼의 조부모는 지갑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해서 당시 유행하던 이주 노동자로 생계를 이어 나가다 1922년 벨라루스의 브레스트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 크루그먼은 뉴욕의 알바니에서 태어나 나소 카운티(우리나라로 치면 나소군)의 메릭(Merrick)이라는 마을에서 잠깐의 유년기를 보내고 뉴욕에서 가까운 뉴저지의 벨마(Belmar)로 이주했다. 어린 크루그먼에게 그의 부모는 높은 관심과 교육열로 그의 학업을 지지해 주었다.

 

케네디 고등학교 전경

 

 그렇게 크루그먼은 존. F. 케네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여타 경제학자가 그렇듯 수학과 과학에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크루그먼이 처음부터 경제학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소년기의 크루그먼은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Айзек Азимов)의 소설 「Foundation」 시리즈를 즐겨보곤 했다. 이 소설에는 역사의 흐름을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심리역사학(Psychohistory)'이라는 가상의 학문이 등장하는데, 청소년기의 크루그먼은 이를 동경해 심리역사학을 전공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소설 속 심리역사학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에 가장 비슷한 경제학을 차선책으로 선택했다.

 

예일 대학교 상공

 

고등학교를 졸업한 크루그먼은 예일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의 경제학과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그는 1974년에 경제학과를 상위 5%의 성적으로 Summa Cum Laude와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 학위를 취득할 목적으로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교(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 입학해, 루디 돈부쉬(Rudi Dornbusch)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준비했다. 후에 크루그먼은 그의 지도 교수인 루디 돈부쉬를 향해 " one of the great economics teachers of all time(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 교사 중 하나)."으로 극찬했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자신의 열정과 기술을 습득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도록 영감을 준다는 소감을 밝혔다. 또한 돈부쉬에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중 돈부쉬는 독점 경쟁 무역 모델이라는 아이디어가 흥미롭다고 격려했다. 1977년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Essays on flexible exchange rates(융통성 있는 환율에 관한 글)」을 내면서 3년 만에 경제학 박사와 석사 학위를 전부 취득했다.

 

 

 여담으로, 크루그먼이 MIT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크루그먼은 1977년 초, MIT를 통해 포르투갈 중앙은행에 3개월간 파견되었던 적이 있다. 포르투갈은 수 십 년 동안 신국가 체재를 앞세우던 살라자르의 독재에 경제가 낙후되기 시작했다. 살라자르의 경제 정책은 극단적이고 보수적이어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경제 성장이 뒤처졌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식민지들과 전면전을 벌이니 포르투갈 경제는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어 가면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다 살라자르가 병으로 쓰러지고 후임으로 들어온 마르셀로 카에타누 총리마저 독재 체재를 유지하며 포르투갈 국민들을 억압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군의 청년 장교들은 MFA(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국군운동)을 결성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토록 역사적인 사건을 크루그먼은 직접 목격했다. 

 

같은 해 9월, 크루그먼은 예일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다. 조교수가 되어 학술적으로 무의미한 경쟁을 계속 이어나간 크루그먼은 자신의 조교수 생활을 "an oppressed assistant professor(억압받는 조교수)"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The Theory of Interstellar Trade(성간 무역 이론)」이라는 논문을 작성했는데, 논문의 내용은 심리역사학의 영향 때문인지 빛의 속도로 운송 중인 상품에 관한 이자율을 계산하는 다소 공상과학(SF)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교 전경

 

2년간의 조교수 생활을 마치고, 1979년에는 MIT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때부터 2000년까지 MIT 경제학 교수진의 일원으로 재직했다. MIT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도중 CEA(Council of Economic Advisers, 경제자문위원회)에서 1982년부터 1983년까지 1년간 재직했다. 그가 CEA의 위원으로 발탁된 이유는 1979년에 발표한 「Increasing returns, monopolistic competition, and international trade(수확 체증, 독점적 경쟁, 국제 무역)」라는 논문이 국제경제학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8년 노벨 위원회에서는 위 논문을 "The basic idea is reathe self-evident, but the step from speculation to a stringent and cohesive theory is substantial—and this was precisely the step Krugman took(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상당히 자명하지만, 추측에서 엄밀하고 일관된 이론으로 나아가는 단계는 큰 도약이 필요하며, 바로 이러한 도약을 크루그먼이 실현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크루그먼은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와 독점적 경쟁(Monopolistic Competition)의 상황에서의 무역 패턴을 분석했다. 고전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면서 국제 무역에 관한 통상적인 이해를 뒤집었다.

 

 

국가의 자원에 따른 생산 가능성과 무역 균형에 관한 그래프

 

 기존의 국제경제학에서는 헥셔 올린 모델(Heckscher Ohlin Model, H-O Model)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그리고 H-O 모델은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기반한 무역을 강조한다). 하지만 H-O 모델은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는데, 일단 H-O 모델은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생산 요소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쉽게 말해, 어느 국가도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국가에서 자본 또는 노동력을 수입할 수 없고 수출도 할 수 없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가정은 각 국가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생산 요소를 기반으로 무역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생산 요소가 부족한 국가와 풍부한 국가 간의 상대적 우위와 열위가 발생한다. H-O 모델은 국가 간의 생산 요소의 이동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한계를 보이는데, H-O 모델은 어느 상품에 관해 모든 국가가 무조건 노동 또는 자본 중 하나에 집약적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 A 국가는 자동차를 생산할 때 자본을 사용해 즉, 기계와 기술을 집약적으로 사용해 자동차를 생산하고 B 국가는 단순 노동만으로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상황에서는 A 국가는 자동차 생산에 있어 자본 집약적이고, B 국가는 자동차 생산에 있어 노동 집약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H-O 모델에서는 같은 상품이라도 국가에 따라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요소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요소 집약도 역전 현상이 일어났을 때 H-O 모델은 대처할 수가 없었고 복잡한 무역 패턴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또한 H-O 모델은 시장이 특정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완전 경쟁 시장을 가정했다. 완전 경쟁 시장을 구현하기 위한 네 가지 특정 조건에는 첫 번째, 기업이 시장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또는 서비스가 완전히 동일하거나 서로 대체되어야 한다. 세 번째, 그 누구도 시장 가격에 영향을 끼칠 수 없어야 한다. 네 번째, 시장의 모든 참여자(구매자와 판매자)가 완벽한 정보 균형을 이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조건들을 온전히 충족시키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았고, 시장을 설명하기에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 말고도 H-O 모델은 국가마다 기술의 차이가 없다고 가정하거나 소비자의 선호나 성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현실과는 괴리가 존재했고,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크루그먼은 전통 방식을 버리고 딕시트-스티글리츠 모델(Dixit Stiglitz Model, D-S Model)을 국제무역론에 적용했다. 

 

기업의 수가 늘어날 때의 비용 곡선(CC)과 가격 곡선(PP)을 나타낸 그래프
인구 증가 전후(CC1 → CC2) 기업의 가격(PP)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

 

 D-S 모델에서는 H-O 모델과 다르게 각 상품들이 서로 다르다고 가정한다. 이는 기업이 독특한 상품 전략으로 소비자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면 기업이 그 상품 시장의 일정 부분을 독점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독점적 경쟁). 그리고 이러한 가정은 소비자가 다양한 브랜드 선택을 선호함을 전제로 한다(이를 입증하기 위해 크루그먼은 자동차 시장에 다양한 버전의 자동차가 유통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로써 상품의 차별화를 통해 소비자의 선택 기회가 확대되고, 기업들의 비가격 경쟁을 촉진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시장을 활성화시킨다. 또한 D-S 모델은 H-O 모델과 유사하지만 다른 경쟁 시장을 가정한다. 기업들이 H-O 모델은 가격으로만 경쟁한다고 가정하지만, D-S 모델은 상품의 혁신 또는 개선을 통해 경쟁한다고 가정한다. 결과적으로 D-S 모델은 상품의 차별화를 통해 규모의 경제(기업의 수가 늘어나 상품의 생산량이 많아질수록 상품의 가격이 낮아지는 현상)를 달성하고, 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가정을 통해 소비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소비자 친화적인 면모를 보인다. 따라서 H-O 모델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대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성 선호'를 모델링하기 위해 지속적 대체탄력성(Constant Elasticity of Substitution, CES) 효용 함수를 가정에 포함시켰다. 간단하게만 살펴보면, CES는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교환될 수 있는지, 이러한 교환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에 따라 제품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이나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할지를 결정하거나, 성향에 따라 사용 가능한 것과 선호하는 것을 기준으로 효용을 계산해 선택의 균형을 계산하고자 한다. 쉽게 말해, 당신이 샌드위치를 만들 때 무엇을 얼마나 더 넣을지에 관한 선택을 당신의 성향에 따라 레시피의 완벽한 균형을 찾는 것을 도와주는 레시피가 바로 CES 효용 함수이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변수와 선호, 자원 등을 고려해 최상의 결과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수학적 도움을 주는 경제학 모델이다.

 

이로써 크루그먼의 모델은 비교우위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각 국가가 상품의 특정 부분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GVC(Global Value Chain) 방식에 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또한 특정 기업이 초기에 어떤 상품에 대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을 경우, 잠재적 경쟁업체에 대해 상당한 진입 장벽을 구축할 수 있는 'First-Mover Advantage(선점자 이점)'에 관해 다룬다. 이는 정부가 전략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크루그먼은 그렇게 해야만 국내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세계화의 역학과 무역에서의 정부 역할을 강조했다. 현재 국제 무역의 많은 모델들은 규모의 경제와 소비의 다양성 선호를 포함하는 크루그먼의 선례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무역 모델링 방식을 신 무역 이론(New Trade Theory, NTT)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 무역 이론이 토대가 되어 크루그먼이 CEA의 일원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사실 CEA에 발탁된 이유가 NTT을 통한 무역 개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79년, 크루그먼은 JMCB(The Journal of Money, Credit and Banking)에 통화 위기에 관한 논문 「A Model of Balance-of-Payments Crises」게재했다. 이 논문은 대학원생 시절 크루그먼은 미국의 두 경제학자 스티븐 실란트(Stephen Salant)와 데일 헨더슨(Dale Henderson)이 연방준비제도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 FRB)에서 금 시장의 투기적 공격(Speculative Attack)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투기적 공격은 투자자들이 특정 국가의 통화 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대규모로 그 통화를 매도하여 실제로 가치가 하락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이 논문에서는 투기적 공격에 대해 다루고 이러한 현상이 현실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크루그먼은 고정 환율 제도 하에서는 국가가 지속적으로 대규모 재정 적자를 보이면 투자자들은 통화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 예측해 자금을 전부 회수할 것이며, 이에 따라 외환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크루그먼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1990년대 초,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경제 성장을 이뤄내며 외환을 대량으로 유치했다. 이에 따라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과열되어 가며 대외 부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외국 투자자들은 아시아 국가의 통화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자본을 모두 회수한다.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 보유고는 외환이 줄어드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고, 크루그먼이 예상한 대로 아시아에 대규모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이때 아시아 국가들은 환율 정책을 고정 환율 제도를 버리고 변동 환율 제도를 택했다. 이때부터 다양한 나라들이 변동 환율 제도를 택했고, 변동 환율 제도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1979년은 그에게 다사다난했지만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이후 큰 행적 없이 지내다가, 11년이 지난 1991년 「Increasing Returns and Economic Geography」 라는 이름의 논문이 Jounal of Political Economy(J. Political Econ.)에 게재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신 경제 지리학(New Economic Geography, NEG)이 소개되었다. 이전에 살펴봤던 NTT 모델의 논리와 아이디어도 NEG에 녹아 있다. 논문에 대해서는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크루그먼이 이 논문을 작성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 활동이 특정 지역에 어떻게 집중되는지와 이러한 집중이 지역 간에 어떤 경제적 불균형을 초래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중심지-주변지 모델을 보여주는 그래프(가로:무역비용, 세로:지역이 차지하는 비중)

 

이때 크루그먼은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지리학자 발터 크리스탈러(Walter Christaller)의 중심지 이론(Central Place Theory)과 스웨덴의 지리학자 토르스텐 헤거스트랜드(Torsten Hägerstrand)의 확산 이론(Diffusion Theory)에서 영감을 얻어 중심지-주변지 모델(Core-periphery model)을 도입했다.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지면, 기업은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상품을 생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특정 지역에서의 경제 활동이 주변지의 경제 활동에 비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홈 마켓 효과). 또한 기업은 운송 비용을 신경 쓰기 때문에 소비자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것도 특정 지역에 경제 활동이 집중되는 현상을 보였으며, 이를 정교히 증명해 냈다. 경제 활동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 그 지역에 더 많은 자본과 노동을 끌어들이며, 다시 대규모 생산이 활성화되고 또다시 생산 비용은 낮아지는 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서울이 중심지 역할을 하며, 중심지로서 주변지에 비해 집중적인 경제 활동을 보인다. 

 

(왼쪽부터)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과 전미경제학회

 

그리고 이 시기에 크루그먼은 노고를 인정받아 전미경제학회(American Economic Association, AEA)로부터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John Bates Clark Medal)을 수여받는다.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은 40세 이하의 미국 경제학자 중에서 뛰어난 학술적 기여를 한 인물에게 수여되는데, 크루그먼의 경우 국제 무역 이론과 경제 지리학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수상하게 되었다. 2009년 이전에는 2년마다 한 사람에게만 수여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이 노벨상보다 받기가 더 어렵다고 평가되며, 이 메달을 수여했다면 노벨 경제학상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추후에 결국 크루그먼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다.

 

여담으로 크루그먼은 1992년 대선 기간 동안 뉴욕 타임스에서 빌 클린턴(Bill Clinton, 제42대 미국 대통령)의 경제 계획을 칭찬했고, 클린턴은 크루그먼의 연구 일부(소득 불평등)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클린턴은 크루그먼에게 행정부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려고 했는데, 크루그먼 특유의 변덕적이고 솔직한 발언들 때문에 클린턴은 다른 후보를 물색해야만 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는 혀를 깨물고 참아야 하는데, 그러는 데에 능숙해야 한다(You have to be very good at people skills, biting your tongue when people say silly things)." 또는 "나는 깨끗한 사무실에 들어가서 3일이 지나면 마치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I can move into a pristine office and within three days it will look like a grenade went off)." 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외에도 크루그먼은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잡지, 신문사에 자신의 글을 자주 기고했다. 이 시기에 크루그먼은 보호주의와 세계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zation, WTO)에 대한 반대부터 공급 측면 경제학(70-80년대에 유행했던 경제학 사조로, 규제를 완화하여 자유 무역을 허용하면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거시경제 이론)에 이르기까지, 민감한 정치적 경제 이슈에 대해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다양한 입장들을 비판했다. 

 

개중에는 아시아에 관한 비판이 있었는데, 1994년 Foreign Affairs에 「The Myth of Asia's Miracle」이라는 이름의 논문에서 그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 아시아의 경제 성장은 "아시아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눈부셨다. 높은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을 보였으며, 성공적인 산업화와 수출 주도 성장으로 금세 세계 시장에 진출했다.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사회적 지표에서 상당한 행보를 보이며, 전형적인 경제 성장 성공 사례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아시아의 경제적 성공이 기적을 이뤘다는 것이 낭설이라고 비판했다.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새롭고 독창적인 경제 모델이 도입된 것이 아닌 단순히 자원 동원에 의해 촉진되었기 때문에 성장세가 필연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크루그먼은 해결책으로 총 요소 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 TFP) 증가를 언급하며, 이를 통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크루그먼은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던 1980년대 말, 일본 경제는 버블 붕괴로 인해 디플레이션과 저성장을 경험하며,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빠졌다. 이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며, 1990년대의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그 원인을 연구했다. 그런 경제학자들 중 하나였던 크루그먼은 침체에 빠진 일본에 대해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유동성 함정은 금리가 제로에 가까워져서 통화 정책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금리는 제로에 가까워서 일본 정부가 통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경기 침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1999년에 발간된 저서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에서 크루그먼은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일본 정부의 대응이 공격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일본에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를 시행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크루그먼의 제안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는 회의적이었다. 2000년대에 일본의 경제는 금융위기와 대지진과 같은 악재에 직면하며 좋지 못한 상황에 놓였다. 이로 인해 성장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아베 신조가 총리로 당선되고, 아베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에서 크루그먼의 제안이 수용되었다. 크루그먼의 주장대로 일본 중앙은행은 물가상승률을 연간 2%로 설정하고, 크루그먼이 제안한 양적 완화를 포함한 다양한 통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일본 경제는 단기적인 회복세를 보였다. 크루그먼은 이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2000년대 후반에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경기 침체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며, 선진국들의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는 확장적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전경

 

이 시기에 크루그먼은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ion university)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크루그먼은 대학원 수준의 국제 경제학을 가르쳤고, 가끔 학부생들을 위한 강의도 진행하곤 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대학원생의 지도 교수로 보냈으며 여타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연구 활동과 강연, 세미나에 참여하곤 했다. 


폴 크루그먼은 2008년 말에 출간된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에서, 이 책은「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의 개정판으로 2008년 대공황을 포함한 최신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크루그먼은 금융기관들의 과도한 리스크 부담, 부채 의존도 증가, 그리고 금융 파생상품의 복잡성이 경제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부의 적절하지 못한 대응도 공황을 심화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통화) 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금융기관이 과도한 리스크를 부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와 리스크 관리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루그먼의 주장은 미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가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채택하게 만들었고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Dodd-Frank Wall Street Reform and Consumer Protection Act)과 같은 금융 규제 법안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크루그먼의 경제 모델과 주장들은 글로벌 경제 위기를 대응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스웨덴의 국왕으로부터 노벨 상을 수여 받는 크루그먼

 

이후 크루그먼은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과 신무역이론 및 신경제지리학 연구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8년 노벨 경제 과학상(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상을 수여한 위원회는 "By having integrated economies of scale into explicit general equilibrium models, Paul Krugman has deepened our understanding of the determinants of trade and the location of economic activity(폴 크루그먼은 규모의 경제를 명시적인 일반 균형 모델에 통합하면서, 무역의 결정적 요인과 경제 활동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켰다)."라는 말과 함께 크루그먼의 업적을 평가했다.

 

End This Depression Now!

 

크루그먼의 대공황에 대한 관심은 그치지 않았고 2012년에 「End This Depression Now!」라는 이름의 책으로 표출되었다. 크루그먼은 이전과 동일하게 2008년 대공황의 원인을 정책 입안자들의 서투른 대응과 정책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인 경제 데이터들을 들어서, 현재 정부들이 시행하고 있는 재정 삭감과 긴축 정책은 경제에서 순환돼야 하는 자금을 빼돌려 가난한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조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당시 부채 문제를 짊어지고 있어서 재정 삭감과 긴축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가들의 사정도 알고 있었던 크루그먼은 부채를 줄이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1930년 이후 가장 심각하게 경제가 침체된 최악의 시기에 부채를 줄이려고 시도하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이며, 대신에 민간 부문이 완전 고용에 가까워지면 민간 부분이 정부의 지출 가소와 긴축 부담을 견딜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공 부문이나 민간 부문이 경제를 활성화하지 못하면 현재의 불황을 불필요하게 연장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은 금융 위기 이후 몇 년 간 긴축 정책이 지배적이었으나, 유럽 전역의 경제 성장이 크게 둔화되면서 실업률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럽은 국제기구와 여러 경제학자로부터 긴축 정책이 경제 회복을 더디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판을 받아들인 유럽 중앙은행은 2015년부터 연방준비제도의 정책을 모방한 양적 완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정책의 전환은 유럽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본문에선 소개하지 못했지만 마저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크루그먼이 작성한 책인 「End This Depression Now!」과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은 높은 판매 성과를 얻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외에도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책이 있다. 그 책들이 바로 「The Great Unraveling: Losing Our Way in the New Century(2003)」와 「The Conscience of a Liberal(2007)」이다.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하자면 전자는 2000년대 초반의 미국과 세계 경제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그래서 George W. Bush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의 경제 정책, 전쟁과 같은 대외 정책, 그리고 정책들이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인지 책에서는 이러한 시기를 "The Great Unraveling"라고 표현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가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후자는 2000년대 중반 뉴딜 정책과 같은 보수적인 정책들이 어떻게 중산층을 괴롭히고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켰는지를 분석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펼칠 것을 제안하고 정치적 권력이 경제 정책에 많이 반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시립대학교의 전경

 

이외에도 2015년에 프린스턴 대학교를 떠나 뉴욕시립대학교(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CUNY)의 석좌 교수가 되었다던지, 크루그먼이 결혼을 1978년과 1996년에 각각 두 번 결혼했다던지,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크루그먼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Potemkin Superpower(외관은 강력해 보이지만 내부는 약하다)"라고 표현했다던지 등과 같은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 많아 본문에 다 담을 수는 없었다.

크루그먼은 현재진행형이며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와 뉴욕시립대학교의 석좌 교수를 병행하면서 지내고 있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뉴욕 타임스를 통해 활발하게 글을 쓰는 것이 그의 주요 업무이며 그의 칼럼은 보통 경제 이슈와 정책 분석, 정치 경제학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그의 의견은 아직 유효하며 여러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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