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주의(Monetarism)의 창시자이자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며 자원 할당의 효율성과 경제적 번영, 소비자의 선택을 중시하고자 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획기적인 경제 아이디어는 정책과 사상의 틀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191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끝에 뉴저지의 러트거스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과 경제학에 전념했지만 수학과 관련된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하고는 경제학으로 마음을 굳히기에 이른다. 그렇게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시카고학파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시카고 대학에서 후에 프리드먼의 평생 파트너가 되는 로즈 디렉터를 만난 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시카고 대학에 잠깐 돌아와 연구 조교로 1년을 보낸다. 이때 조지 스티글러, 앨런 월리스 등과 우정을 쌓게 된다.
일명 New Deal Washington이라는 뉴딜 정책에 참여한 앨런 월리스의 도움으로 1935년 NRPB(National Resources Planning Board, 국립자원계획위원회)에서 대규모 소비자 예산 연구 참여하게 된다. 이를 위해 프리드먼은 워싱턴 DC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NRPB에서의 경험은 프리드먼의 저서인 「소비 함수 이론」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이후 프리드먼은 1937년 가을에 197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사이먼 쿠츠네츠의 직업 소득 연구를 돕기 위해 NBER(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국제경제조사국)에 들어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Incomes from Independent Professional Practice」라는 이름의 논문이 출판되었고 이 논문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프리드먼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프리드먼의 초기 소비 연구와 영구 소득 가설의 촉매제가 된 것은 뉴햄프셔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아내와 도로시 브래드, 마거렛 리드와 함께 나눈 대화이다. 아내와 두 친구도 소비 관련 연구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나눈 대화는 소비에 관한 프리드먼의 초기 연구와 전문직 종사로 인한 소득 분석을 결합하여 궁극적으로 영구 소득 가설을 수립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몇 년 후 1941년부터 1943년까지 프리드먼은 미국 재무부에서 전시 세금 정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해럴드 호텔링 및 앨런 월리스가 이끄는 컬럼비아 대학 통계 연구 그룹(Statistical Research Group, SRG)에서 군사 무기 설계, 군사 전술 및 금속 실험에 대한 수학적 통계를 맡았다. 이후 위스콘신 대학과 미네소타 대학에서 각각 1년씩 가르쳤고, 미네소타에서 지낸 1년간 조지 스티글러에게 합류해 공동 집필한 「지붕인가 천장인가? 현재의 주택 문제(Roofs or Ceilings? The Current Housing Problem)」는 당시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고,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택 시장과 정부 개입, 임대료 통제의 영향을 조사하고 임대료 통제가 주택 부족, 품질 및 유지 관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으며 주택 시장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취해야 하는 정책에 대한 논쟁이 담았다. 이 논문에는 추후 프리드먼이 가지는 인센티브에 관한 성향이 드러나 있다. 1946년에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 이론 강의를 맡게 되었고, 시카고 대학은 그의 지적 고향이 되었다. 또한 당시 NBER의 연구 이사였던 아서 번스는 프리드먼에게 연구진에 다시 참여해 경기 순환 속 돈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프리드먼은 이를 수락했다.
1947년에는 스위스 몽펠르랑에서 열리는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MPS)의 첫 모임에 참여해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칼 포퍼 등의 신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논의하고 개발해 나갔다. 프리드먼에게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는 연구와 강의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
시카고 대학과 NBER의 결합은 생산적이고 순조로웠으며 프리드먼은 시카고 대학에 Workshop in Money and Banking을 설립하고 워크숍에서 화폐경제학 분야의 광범위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프리드먼의 화폐 역학과 정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에 충분했고 나아가 통화주의의 탄생과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통화주의는 통화 공급 통제와 통제가 인플레이션 및 경제 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옹호하는 경제 이론으로, 전 세계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줬고 20세기 중반 케인스주의가 지배하는 환경에 도전하고 이를 변화시켰다. NBER에서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중, 프리드먼은 안나 슈워츠와 중요한 만남을 가졌다. 이 만남은 프리드먼의 연구 경력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안나 슈워츠는 프리드먼의 이론적 결함을 보완해주면서 연구는 경험적 연구와 이론적 발전을 통해 보다 정교하고 심도 깊은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1950년, 프리드먼은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을 관리하는 미국 정부 기관의 자문 위원으로 파리에 3개월 동안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공동 시장의 전조가 되는 슈만 선언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그의 연구는 공동 시장은 유동 환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때부터 프리드먼이 유동 환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과 「유동 환율의 사례 (The Case for Flexible Exchange Rates, 1969)」 출간하게 되었다.
그 뒤로,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직을 유지하며 경제 이론과 통화주의, 시장 경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 여러 세대에 걸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프리드먼은 그의 매력적인 강의와 철저한 경제 분석 방식으로 점차 명성을 쌓아갔다. 동시에, 그는 NBER에서 통화 및 경제 동향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이어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경제 통계와 재무 기록의 역사를 자세히 분석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했다. 이후 1953년부터 1954년까지 풀브라이트 방문 교수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케임브리지 경제학 교수진은 케인즈 다수파와 반케인즈 소수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두 파벌 모두 그의 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극단적이라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프리드먼은 자신이 왜 펠로우쉽에 초대되었는지 알 수 있었고 케임브리지에서의 시간은 그의 경제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풀브라이트 방문 교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카고 대학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굳혔고, 이 기간 동안 그는 '영구 소득 가설'을 발전시켜 사람들이 단기적인 소득 변화보다는 장기적인 소득 기대치에 기반하여 소비 결정을 내린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1962년, 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 자본주의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 프리드먼의 저서 「Capitalism and Freedom(자본주의와 자유)」가 시카도 대학 출판부를 통해 출판되었다. 그는 책을 통해 자유시장 경제와 정부의 제한된 역할을 강력히 옹호하며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철학을 널리 전파했다. 1963년 프리드먼은 미국 역사에서 화폐 공급과 경제 활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인 「미국 화폐사( 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를 안나 슈워츠와 공동 집필했다. 이 책은 미국의 통화 정책과 경제 순환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으며, 대공황의 원인을 '중앙은행의 정책 실패'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공해 당시 경제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킴과 동시에 학문적 명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년 후 프리드먼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경제 자문으로 활동했다. 골드워터는 강력한 자유시장 옹호자였으며, 프리드먼의 견해는 골드워터의 정책과 잘 맞아떨어져 골드워터는 선거 캠페인 동안 인플레이션 관리, 세금 감소, 정부 지출 축소와 같은 주제를 프리드먼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를 통해 프리드먼은 경제학적 이론과 정책 제안을 더 넓은 대중과 정치계에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골드워터는 끝내 선거에서 패했지만, 프리드먼에게는 자신의 학문적이고 공적인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담으로, 자본주의와 자유는 버몬트에 있는 프리드먼 부부의 여름 별장에서 집필되었다. 이 별장의 이름인 "Capitaf"도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는 관광지로 분류되어 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보통 대학생이나 사상가가 참가하며, 자유 시장과 공공 정책에 관한 토론을 주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년 뒤인 1968년, 프리드먼은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경제 고문으로 일하면서 공공 분야의 비중을 높여 가기 시작했다. 특히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닉슨이 신뢰하던 프리드먼의 자유주의에 관한 정책들이 일부 시행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지속해 통화주의를 지지하고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던 프리드먼은 새로운 세대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1970년에는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게재되기도 했다. 프리드먼은 에세이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개인과 기업의 역할, 윤리적 관행 등의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기업의 목표를 '이윤 창출'로 재정의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프리드먼의 주주 자본주의는 비평가들의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렇게 쌓은 명성을 기반으로 프리드먼은 소비 분석, 통화 역사 및 이론,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을 설명한 공로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며 그는 자유시장 내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시장의 장점과 정부 개입의 단점을 강조했다. 1980년에는 그의 아내 로즈 프리드먼과 함께 'Free to Choose'라는 이름의 책과 TV 시리즈를 출판하고 방영했으며, 자유 시장 경제의 원칙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국가의 경제 정책 자문 역할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와 동유럽의 경제 개혁에 이바지했다.
1990년대에도 그의 선한 영향력은 멈추지 않고 그의 아내와 함께 1996년 Ed Choice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재단은 교육 개혁과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학교 선택 확대를 장려한다. Ed Choice는 미국 전역에서 학교 선택 확대를 촉진하는 연구 수행, 정책 홍보 등을 통해 프리드먼 부부의 비전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 후, 지속해서 논평과 강연을 다니다가 2006년에 향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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