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거시경제학의 시초가 되는 케인스 경제학 창시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 경제 사상과 정책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서 그의 사상은 경제학계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여전히 학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케인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자.
1883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아버지와 지역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육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는 자식을 많은 애정과 주의 깊은 통찰로 길러냈다. 그들의 애정은 자식들이 언제든지 돌아와서 쉴 수 있도록 평생을 한 집에서만 살았을 정도로. 그러한 부모가 이후 케인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의 경우 논리학과 합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아버지의 사상은 그대로 케인스의 이론에 흘러 들어가 체계적인 논리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경제와 도덕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자극시켜 케인스의 지속적인 연구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렇게 케인스는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개발하게 되었다.
케인스는 유년기 시절 교육을 주로 집과 학교에서 나눠 받았다. 1890년에 2년간 퍼스 스쿨 유치원(The Perse School Nursery)에 다녔었다. 학교의 교사는 케인스가 똑똑하지만, 결정력이 부족한 아이로 평가했다. 1892년에는 세인트 페이스(St Faith) 사립 초등학교의 학생이 되어 학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종종 장기 결석을 하곤 했다.
1897년에 장학금을 받고 뼈대 있는 가문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된다. 당시 장학금은 일반적으로 시험에 기반해 지급되었으며, 이때 당시 장학금은 금전적인 이유 뿐만이 아니라 학문적 우수함을 인증하는 권위 있는 상으로서 인정 받곤 했다. 학교마다 과목은 달랐으나 이튼 칼리지의 과목은 라틴어, 그리스어, 역사, 수학 등의 과목을 포함했다. 수학에만 강점이 있었던 케인스는 그의 아버지에게 따로 장학금 시험을 대비한 교육을 받았다. 케인스는 이튼 칼리지에서 수학, 고전, 역사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상이란 상은 휩쓸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훗날 영국 수상이 되는 해럴드 맥밀런이다.
1902년 케인스는 또다시 장학금을 받고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 입학한다. 케인스도 처음부터 경제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였는데, 그는 학업 초기 수학에 중점을 뒀고 철학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 수학을 전공했지만, 수학에 "나를 탈진시키고, 감성을 파괴하며, 천성을 썩히는" 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수학 성적이 좋지 못했다. 케인스는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행하던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의 철학적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 정치경제학 교수를 지내고 있었던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에게 경제학자가 될 것을 권유받고는 이후 경제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또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의 사도들(Cambridge Apostles)의 회원이였다. 이 조직은 케임브리지 학생에 의해 설립되었고 다양한 지적, 철학적 토론이 목적의 주류를 이루며 훗날 영국의 문화와 생활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곳에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리튼 스트레이치, 이엠 포스터, 레너드 울프, 조지 에드워드 무어 등의 당대 저명한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케인스는 이러한 조직의 활동적인 멤버였고 졸업 이후에도 유대 관계를 돈독히 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종종 들르는 정도로. 케임브리지의 사도들 활동 외에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론회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Cambridge Union Society)의 1905년에 회장을 역임했고 "The Lit"로 알려져 있는 케임브리지 문학 클럽에도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학사를 받고 난 이후에도 휴식을 취하는 대신에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논쟁에 참여했으며, 졸업 하고서도 철학과 경제학을 종종 공부하며 지내다가 1905년에 케임브리지 트리포스를 합격했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케인스는 토론과 연설에 대한 경험을 쌓고, 현대 정치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이렇게 케임브리지 대학은 경제학자가 가져야 할 통찰력과 정확성, 이해도 등을 길러주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케인스는 1905년에 공무원 공부를 시작하여 1906년에 전체 학생 중 차석으로 합격하며 공무원이 되었다. 유독 수학과 경제학의 성적이 낮았지만 차석을 차지했을 정도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낮은 경제학 성적에 불만이 있었는지 시험관을 향해 "나보다 경제학을 모르는 것 같다" 라고 평했다. 이때부터 자신의 경제학적 재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무원 시험 준비 중에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원론」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마샬은 경제학적 직관과 실용주의에 기반한 수식 없는 경제 이론에 깊은 인상을 받은 케인스는 「경제원론」을 통해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공부를 시작했고 마샬은 이런 케인스가 기특한 나머지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케인스는 자신에게 경제학적 재능이 있을 것 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고, 자신의 친구에게 "어쩌면 난 경제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라는 문구를 남기게 된다. 훗날 이 문구는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위대한 경제학자의 경제학 입문을 보여주는 말로 인용되곤 한다. 마샬은 아끼는 제자인 케인스에게 자신과 함께 케임브리지 남아 경제학 연구를 하자고 꼬셨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고 2년간 케인스는 공무원의 신분으로 화이트홀에 있는 인도 사무부(India Office)에 근무하게 된다. 관청의 엄격하고 틀에 박힌 업무 방식에 실망을 느꼈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첫번째 저서인 「인도 통화와 금융 (Indian Currency and Finance, 1913) 」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경제학 강사로 활동했다. 케인스는 1911년 당시 영국 최대 경제단체인 왕립경제학회의 공식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그는 케임브리지 강사직을 잠시 중단하고 영국 재무부에서 활동했다. 영국 재무부는 그에게 자문위원의 직위를 내리고, 영국의 외화 부족 문제와 동맹국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업무를 맡겼다. 이 시기에 케인스는 영국의 부족한 외환 보유고를 보존하고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전략을 고안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1919년, 평화 회담이 독일 베르사유에서 개최되었다. 케인스는 당시 영국 총리이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의 경제 고문으로서 베르사유 회담에 참여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부과한 과도한 배상금 정책과 엄격한 경제 조건 등에 깊이 실망한 케인스는 이러한 조건들이 독일 경제를 파괴하고, 나아가 유럽 전역에 경제적 불안정을 초래하고 끝내 유럽의 파괴로 이어질 것 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 조약은 조건을 유지한 채 체결되었다. 그렇게 케인스는 자신의 화려한 공적 경력을 뒤로 하고, 재무부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서 「평화의 경제적 결과(Economic Consequences of Peace)」에서 케인스는 당시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독일에 부과된 배상금의 경제적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과도한 배상금이 가져올 문제를 언급하며 큰 반향을 일으켜 낸다. 예상대로 과도한 배상금은 제 2차 세계 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이렇게 그는 학계에 점점 자신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케인스는 재무부를 떠난 뒤,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와 학업을 재개했다. 전쟁 당시의 경험 때문인지 당시 케인스는 고전적인 경제적 독트린보다는 경제 안정을 위해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강조했다. 케인스 경제학의 토대를 점점 마련해 나가고 있었다. 1921년에는 확률론, 1923년에는 화폐개혁론 등을 발간하며 이론을 정립해 나갔고, 케임브리지에서 프랭크 램지의 지도교수로 활동하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케임브리지로 데려오는 등의 노력을 했다. 1920년대에는 뚜렷한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경제 정책 문제에 관해 정부로부터 자주 자문을 받았다. 그렇게 1929년,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대공황이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경제학 주류 이론은 고전주의 경제학이었기 때문에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비개입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에게 불황이란 일시적인 침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시장이 자연스럽게 교정해줄 것 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대공황을 장기화 시켰고, 케인스는 고전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대공황의 원인을 높은 임금과 금리라고 여겼지만 케인스는 정부 개입의 부족과 총수요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지속적으로 정부가 공공사업 프로젝트로 경제에 돈을 투입하는 게 총수요와 실업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겼고, 케인스의 생각은 들어 맞았다. 이후 당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은 정부가 돈을 쏟아 부어 수요를 창출하는 뉴딜 정책을 펼쳤고, 실업률을 잡아내게 된다. 이때 쓰인 뉴딜 정책의 매커니즘이 케인스의 이론과 일치했기 때문에 케인스는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930년에는 화폐의 본질과 신용, 금융 시스템의 구조를 다루는 화폐론을 출판했다. 화폐론은 현재까지도 중앙 은행의 운영, 인플레이션 통제, 환율 관리 부문에서 사용되고 있다. 화폐론 이외에도 다양한 논문을 학술지와 신문 등에 기고하며 자신의 경제학적 관점을 여념없이 표현했다.
1936년에 그의 주요 저서가 되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가 출판되었다. 이 책이 일반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케인스는 대공황 이전부터 고전주의 경제학을 논리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기 침체가 시작되자, 고전주의의 이론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고전주의 경제학은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통용되는 이론이었던 것. 그래서 케인스는 자신의 이론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통용되는 이론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일반 이론' 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케인스는 이 책으로 고전주의 경제학을 완전히 뒤집으면서 자신만의 케인스 경제학 체계를 수립한다. 이러한 이유로 케인스 경제학에는 '신고전주의' 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지배적이던 세이의 법칙과 현실의 괴리감을 지적하고 대공황 당시 실업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여 신뢰를 샀고, 사람들은 고전주의에서 신고전주의로 넘어가는 이 변화를 케인스 혁명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1936년 케인스가 예측했던대로 세계 대전이 재발했다. 영국 정부는 케인스에게 다시 한번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고, 케인스는 이에 응했다. 그는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쟁 자금 조달을 포함하여 영국의 경제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외에도 미국과 재정 협약 협상 등의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했다. 전쟁은 점점 막을 내려 갔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평가절하와 보호주의, 금 축적 등을 통해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고 그렇게 국제 금융 협력과 무역 시장이 붕괴되었다. 그렇게 제 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이 승기를 잡았고, 세계 경제가 붕괴될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던 미국이 세계 각국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고자 했다.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영국의 케인스가 수 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끝에 미국 뉴햄프셔 주, 브래튼 우즈에 연합국과 식민지의 대표단이 전부 모여 회의를 진행하게 된다. 서로 다른 비전을 갖고 있던 화이트와 케인스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새로운 통화제도에 대해서 케인스는 특정 국가의 통화가 아닌 국제 통화인 Bancor(방코르)를 도입할 것을 지지했으나, 화이트는 미국의 통화인 USD를 통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화이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가 되었고 세계 각국은 금본위제를 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훗날 브래튼 우즈 체재(Bretton Woods System, BWS) 라고 불리운다.
케인스는 경제적인 활동 이외에도 예술과 교육 중심의 활동을 전개한 바가 있다. 그는 영국 예술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지원했으며, 내셔널 갤러리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거나 Bloomsbury Group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등 케인스는 예술 활동을 즐겨 했다. 이렇게 경제 재건과 논쟁, 정책 토론을 이어나가던 케인스는 지속적으로 영국과 해외의 경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946년 4월 21일에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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