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중 하나인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국제 무역 이론의 기초가 되는 비교우위 이론의 창시자이다. 그는 소득 분배, 지대 이론, 노동 가치 이론 등을 다루며 고전경제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항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많은 대중이 경제학을 접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18세기 대체할 수 없는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를 알아보려고 한다.
1772년 4월 19일, 영국 런던의 세파르딕 계통의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리카도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거쳐 잉글랜드에 정착했다. 그가 포르투갈계 성씨인 'Ricardo'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포르투갈에서 거주했었기 때문이다. 원래 유대인의 영국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의 칙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영국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 당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집권했던 17세기 중반부터 유대인의 영국 재입국 방안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영국에 출입하기 시작했고, 영국에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를 잡아갔다. 결정적으로 1753년에 유대인 귀화법(Naturalization of Jews Act, 1753)이 제정되며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영국 국적이 부여되며 쐐기를 박았다. 유대인들이 영국에 정착하는 이유는 영국 정착이 경제적 기회와 종교적 자유 등을 제공했고, 이러한 요소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큰 메리트였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 정착한 유대인 중 한 명이었던 리카도는 아버지인 아브라함 리카도(Abraham Ricardo)가 성공한 주식 중개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중에서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환경이 어느 정도 받쳐줌에도 그는 유년기에 경제나 교양에 관련한 정식 교육은 일체 받지 못했다. 그는 유대인 가정에서 오는 형식적인 종교 교육과 부유한 가정에서 오는 산술과 회계 등의 기본 원리와 다양한 언어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교육만을 받았다. 정식 교육은 아니더라도 그의 아버지가 런던 증권거래소의 중개인이었기에 증권거래소를 오 다니며 금융과 무역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14살이 되는 1786년 무렵 그는 아버지를 따라 중개업에 직접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금융 시장에서 유의미한 경험을 쌓았고, 이 경험들은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제공했다. 그렇게 점차 리카도는 경제 이론과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다.
데이비드 리카도가 21세가 될 무렵, 그는 아버지와 연을 끊었다. 연을 끊은 이유는 종교 문제 때문이었는데 원래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다분했다. 하지만 리카도는 퀘이커 교파 출신의 프리실라 앤 윌킨슨(Priscilla Anne Wilkinson)과 결혼함으로써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유니테리언교로 개종했다. 그렇게 둘의 사이는 악화되었고 결과적으로 아버지와 절연하였다. 이에 따라 어머니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가족과 절연한 것과 무관하게 그는 투자자 및 중개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다. 리카도는 저명한 은행가의 지원을 받아 홀로 사업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주식 중개, 증권 거래, 투기와 투자로 돈을 벌었고, 그 중 리카도는 정부 증권 거래에서 부를 창출했다. 당시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796~1815)이 진행 중인 시기였기 때문에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영국 정부는 증권 발행을 늘렸다. 리카도는 금융 시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가격 변동을 추측하면서 증권 거래에서 큰 이윤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도중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고 인용되곤 한다. 그 이유는 워털루 전투가 금융 시장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렇게 불안정한 시기에 투기를 성공한 리카도를 신화적으로 묘사하려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The Sunday Times는 리카도의 사망 기사를 내보낼 때, 그가 백만 파운드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799년에 우연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을 읽게된 리카도는 늦게나마 경제학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되고, 이때부터 10년 동안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게 1810년에 그의 첫 논문 「The High Price of Bullion, a Proof of the Depreciation of Bank Notes」를 발표한다. 이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는 금본위제와 연관된 Bullion(지금) 논쟁에 참여했다. 그렇게 그는 은행권의 가치 하락과 금의 가격 상승 등을 논의했고, 영국 중앙은행의 화폐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경제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당시 영란은행의 이사들은 발권 증가가 물가 상승과 파운드 평가 절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리카도는 화폐량과 물가 수준은 분명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결국 물가 수준이 환율과 금의 유출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측했다. 이러한 예측은 각국에 금을 관리하는 은행이 경제 상황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고 통화량을 조정토록 했다. 리카도는 이 과정에 제임스 밀(James Mill),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토마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와 친분을 다졌다. 또다시 5년이 흐르고, 그의 두 번째 논문 「 An Essay on the Influence of a low Price of Corn on the Profits of Stock」 출간되었다. 곡물법(Corn Laws)의 경제적 영향과 임대료 이론(Rent Theory)에 관해 논의한 이 논문은 토마스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영감을 얻어 작성되었다. 여기서 리카도는 수입 곡물에 대한 관세 인상은 생산자의 이윤을 하락시키며 지주의 지대 수입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또 2년이 흐른 1817년에 그의 주요 저서가 되는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을 출간된다. 경제사에서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책은, 국제 무역 이론을 형성하고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1814년경 42세의 나이로 주식 중개인으로서의 경력을 은퇴한 리카도는 토마스 맬서스, 제임스 밀, 장바티스트 세(
Jean-Baptiste Say) 등의 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경제 이론을 지속적으로 다듬었다. 1818년에 벌어놓은 재산을 바탕으로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 있는 Gatcombe Park를 구매하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갔다. 그렇게 글로스터셔의 고위 보안관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8월에 " rotten borough(부패 선거구) " 라고 불리던 포탈링턴(Portarlington)의 하원 의석을 구입하여 의회에 입성했다. 자치구의 위치와 규모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리카도의 자유 무역에 관한 견해는 다른 의원들에게 존중 받을 수 있었다. 질병을 가졌던 리카도는 1823년 의회에서 물러났고,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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