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마샬은 현대 미시경제학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제학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학문적 엄격함과 지적 혁신은 경제사상의 발전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마샬의 통찰력은 현대 경제 이론과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알프레드 마샬은 1842년 7월 26일 영국 런던의 버몬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안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마샬은 어릴 때부터 학문적 두각을 드러냈는데, 1850년 런던 노스우드의 머천트 테일러스 스쿨(Merchant Taylors' School)에 입학한 마샬은 수학과 라틴어를 포함한 다양한 과목에서 높은 성적을 거뒀다. 특히 수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이는 전공까지 이어지게 되며, 후에 마샬의 경제 이론과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마샬이 10살이 되는 1852년, 지속적인 산업 혁명에 영향을 받았던 마샬은 이때부터 사회와 경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 시기 영국은 기술 발전과 산업화로 인해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은 시기였는데, 이러한 환경은 어린 마샬에게 내적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 마샬이 18세가 되는 1860년 무렵,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어떤 연구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케임브리지 수학 트리포스에서 Second Wragler 등급을 받은 자신의 수학 능력과 분석적 사고에 기반해 물리학을 연구하고자 했으나 당시 마샬은 부유한 영국에 많은 빈민에 의문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저히 일반적인 수학 공식으로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때부터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한 변화를 결심하며, 형이상학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1865년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연구원(Fellowship)으로 선출되며 형이상학이 아닌 철학과 윤리학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마샬은 19세기 철학과 경제학의 선두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철학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행복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일에 온 힘을 다했고, 그렇게 마샬의 초기 철학적 탐구가 형성되었다. 밀의 영향은 마샬의 후기 경제학 연구에서도 사회 복지와 인간 복지 개선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를 주창하던 헨리 시즈윅의 멘토링을 통해 끝끝내 경제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마샬은 시즈윅의 도움으로 사회 복지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윤리의 철학적 기초에 기반하여 탐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마샬의 초점은 추상적인 철학적 질문보다는 더욱 구체적인 사회 문제에 맞춰지기 시작하고, 철학적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경제학으로 자연스러운 진전을 하게 되었다.
마샬은 극심한 경제적 격차와 산업 혁명 등의 가혹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경제학을 부 창출의 매커니즘으로 볼뿐만 아니라 노동 계급의 조건을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다. 따라서 철학, 정치, 경제학 등을 포함하는 도덕 과학 분야로 초점을 옮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학위를 마친 후 1868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도덕 과학 담당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강의에는 경제학과 여타 개념들이 점점 통합되어 이후에 케임브리지학파의 시초인 수리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1872년, 알프레드 마샬은 본격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강의는 마샬에게 경제학 이론에 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학생들과 공유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정치경제학 강의를 듣던 학생 중 메리 페일리라는 학생과 1877년에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는 독신 규정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케임브리지를 떠날 것을 강요받은 마샬은 브리스톨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초대 교장이 되어, 정치경제학 강의를 재개했다. 2년 뒤, 아내와 함께 집필한 「산업 경제학(The Economics of Industry)」은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밀어내면서 그 지위를 얻게 되었다. 책을 출판하고 큰 명성을 얻게 된 마샬은 1882년,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가 사망하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일생일대 저서 「경제학의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의 집필이 시작되기도 했다. 집필이 시작되고 10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책 집필에 할애했다.
이후 마셜은 1884년, 기존 교수의 사망에 따라 케임브리지 경제 교수로 선출되어 다음 해 1월에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그러고 다음 달에 교수로 취임하여 강연을 시작했다. 1890년 마샬의 10년간 집필이 마무리됐다. 그의 「경제학의 원리」는 경제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신고전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도 쓰이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 한계효용, 생산비용, 탄력성 등의 경제 개념이 담겨 있다. 수학적 한계를 개선하고 보다 전문적인 분야로 만들고자 했던 마샬의 목적에 부합하는 「경제학의 원리」는 여태까지 통용되어 왔던 가격 결정, 가치 등의 분야에서 큰 변혁을 일으켰다. 보다 인간중심적인 접근 방식에는 그의 신념과 어릴 적 경험이 녹아 있었고 일반 대중조차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단했다. 이후 마샬은 케임브리지에 경제학을 위한 새로운 학과를 창설하려고 애썼다. 이전까지는 경제학이 독립된 학문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정치학에서 파생된 학문으로 여겨져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1903년 마샬의 노력 끝에 세계 최초의 경제학과가 창설되었다.
1900년대에도 마샬의 행적은 끊이지 않았다. 「경제학의 원리」 출간 이후로도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 경제 학계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아서 세실 피구 등의 유명한 경제학자들을 배출하며 성장세가 움츠려 들지 않을 것 같았던 마샬도 예전 같지 않은 건강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1908년 교수직 은퇴를 선언하고 지속적으로 경제 이론을 탐구하고 학술 토론에 기여하며 살다가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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